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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il is in the details/2030

"당신 말고도 할 사람은 넘쳐"

"당신 말고도 할 사람은 넘쳐"

경향신문 | 김태훈 기자 | 입력 2014.11.08 13:46


취업 열망에 젊음을 저당 잡힌 인턴들. 유명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업체의 견습생 월급이 10만원이고, 재외공관이나 국제 NGO기구는 사실상 '무급'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보면 꿈도 열정도 사라진다. 저임금ㆍ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딘다 해도 정규직 전환은 기약이 없다. 노예가 된 기분이다. 지금 우리는, 희망마저 착취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6년 전에 월급 40만원 받고 인턴 했어요. 그게 지금도 똑같다는 게 무섭지요." 박기정씨(29·가명)는 의류업체에서 일한다. 6년 전 대학생 시절 박씨는 겨울방학을 맞아 한 회사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쌓았다. 일은 고달팠다. 원단이며 단추 꾸러미며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일은 차라리 나았다. 작은 실수에도 욕과 함께 별의별 물건들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생활은 빠듯하다 못해 부모님 도움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월급 40만원 중 방값으로 15만원이 나갔다. 인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못 먹은 탓에 살이 7㎏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박씨에겐 꿈이 있었다. 대학에서 패션디자인을 전공했다. 의류업체에서 디자이너 경력을 쌓은 뒤 독립해 가게를 차리고 싶었다. 그 꿈마저 없었다면, 자존심을 내놓고 다닌 시간들을 아마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후 박씨는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인턴들을 마주하는 그 자리에서 3년을 일했다. 알고 지내던 대학 후배가 인턴으로 박씨가 일하던 회사에 왔다. 박씨는 그 무렵 부서를 옮겨 그 후배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선 매장을 관리하는 영업지원 쪽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보여주기 껄끄러운 업계의 맨살을 자신이 직접 후배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유명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업체 디자인실 견습생의 월급이 10만원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박씨는 누구보다도 사정을 잘 안다. 30만~50만원 받는 인턴들이 온갖 잡일을 다하며 종처럼 일하는 현실은 주위에 흔하다. 인턴들은 순진하다.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자기들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의 꿈, 그들의 열정을 업체는 교활하게 착취한다.

박씨 자신이 겪었고 대학 후배가 겪은 현실은 지금도 박씨의 회사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 있는 영업부서에선 내가 디자이너 인턴할 때 X같다고 느꼈던 것들을 안 볼 수는 있는데, 그래도 한 회사 안에 있으니 안 보려 해도 보이긴 해요." 박씨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다.

화려한 의류ㆍ패션업계가 더 심해



노은철씨(26)는 박씨의 회사에서 인턴 경험을 했던 바로 그 대학 후배다. 노씨는 당시 인턴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회사를 그만뒀다. 당시를 떠올리며 박씨가 "이 바닥에 남아서 일하려면 참고 끝까지 인턴을 마치라고 해야 되는데,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고 말하자 노씨는 "선배가 나 말렸으면 선배고 뭐고 없고 아예 안 봤을 거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능력이 출중하거나 형편이 좋아서 해외 유명 디자인스쿨로 유학가는 소수를 제외하면 전공을 살려 먹고사는 길은 죽으나 사나 윗사람 말대로 따르는 길뿐이다. 대학시절부터 교수의 사적인 잡일 심부름과 상명하달식 조직에 익숙해진 학생들이다. 노씨는 "특히 지방대에선 아예 인턴 지원도 못하는 애들이 한 번 걸러지고, 인턴 끝나고 직장 못 잡은 애들이 또 걸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턴을 거쳐 회사에 자리를 잡아도 '사수'부터 위로 줄줄이 있는 '선생님'들의 명령에 따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력서에 인턴 경력을 써넣진 못했지만 노씨는 지난해 12월 겨우 취직에 성공했다. 정직원이라는데도 근로계약서 한 장 쓰자는 소리가 없었다. 4대보험에 가입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보험료 안 내도 되니 더 좋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보험료를 안 내도 그만큼 월급이 더 나오면 그만이라며 괜찮다고 생각했다. 토 달지 말고 경력부터 쌓아 놓으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원단 나르기나 창고 재고관리같이 막내 디자이너에게 돌아오는 일도 꿋꿋이 했다.

입사 면접 후 월급 액수가 '80만원 더하기 알파'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그 '알파'를 기대하며 참고 다녀보기로 했던 노씨였다. 하지만 한 달 내내 휴일도 없이 일한 노씨가 월급날을 며칠이나 지나서 겨우 은행에 들를 짬을 냈던 그날 '첫 월급의 로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은행 ATM기계에 잔액이 정확하게 80만원 찍혀 있더라고요. 공과금 같은 게 출금된 게 있나 창구까지 가서 확인했는데 월급이 딱 그돈이었어요." 인턴이나 정직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노씨는 그날 바로 회사를, 그리고 업계를 떠났다. 회사가 빼앗아가는 건 돈만이 아니었다.

정직원 돼도 '사수' '선생님' 층층시하



의류·패션업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열정이 식어 떠나거나, 혹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거나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너 말고도 할 사람은 넘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면 고용 불안정을 누구보다 실감하게 된다. 인턴기간을 거쳐 정규직 채용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확산되면서 마지막 관문 앞에서 실패한 인턴들의 좌절은 곳곳에서 쌓여만 간다.

대학 졸업 전 첫 인턴 경험을 2년 전 대기업 계열사에서 시작했던 김영훈씨(27·가명)는 그때만 해도 무난하게 취업할 줄 알았다. 한 달에 120만원을 받으며 유통업체에서 인턴하던 당시의 김씨에게 그 회사는 나름 '안전빵'이었다. 더 대우가 좋은 회사에 붙으면 언제든 옮겨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턴 기간에 정규직 채용과정에서 합격하지 못한 김씨는 이후로 낙방의 아픔을 연거푸 맛봐야 했다. 인턴 채용까지는 통과했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최종 단계에서 미끄러진 경험만 두 차례 더 있었다.

법학 전공인 김씨는 가고 싶은 회사를 입맛대로 고를 입장이 아니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인턴 월급이 대체로 최저임금 수준을 간신히 넘기는 선인 110만~130만원대로 형성돼 있지만 그에 훨씬 못 미치는 60만원대 월급을 받으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한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지만 애초에 정규직 전환 가능성은 희박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나름 김씨를 배려한다는 듯이 회사 상사가 계약직으로 더 일할 수 있다고 말했던 날을 김씨는 잊지 못한다.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나름 명문대라고 취업에 자신 있었는데 내 처지가 이렇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죠."

단지 자신감을 잃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혹 면접 단계까지 올라가도 과거 인턴 이후 왜 정작 입사에는 실패했는지를 묻는 면접관들의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아야 했다. "언제는 인턴으로 실무경력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던 얘기가 나돌더니 이제는 인턴 여러 번 했다고 하면 왜 인턴만 하다 정직원 못 됐냐고 꼬치꼬치 캐묻잖아요. 그렇다고 인턴 경력 빼고 자기소개서 쓰면 그때는 또 '나이가 좀 있는데 그동안 아무 경력도 없느냐'고 물으니까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김씨는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인턴 경력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들이는 시간과 열정에 비해 돌아오는 보상은 낮은 수준의 임금뿐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기업이 인턴 방식으로 채용하는 규모는 약 50만명에 달하지만 이들의 임금수준을 분석한 통계조사 자료조차 없어 전체 인턴들의 임금수준을 가늠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가 중소기업과 청년층 구직자 간의 구인·구직을 연결하기 위해 시행하는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사업을 통해 대략적인 윤곽만 살필 수 있는 형편이다.

인턴경력 없어도 흠잡고 많아도 흠잡아



고용노동부의 중소기업 청년인턴제 사업 실적 내용을 보면 인턴제 참여자의 22.1%가 월 120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 120만원 이상 150만원 이하를 받는 참여자는 전체의 35.1%에 달해 절반 이상이 150만원이 안 되는 월급을 받았다. 월 101만원 수준인 최저임금만 받는 이들도 2.3%나 됐다. 지난해 기준 대졸 신입사원 평균 초임 265만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그나마 이마저도 안정적인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부는 인턴 기간 중에는 최대 6개월간 월 80만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추가 6개월간 월 65만원을 예산으로 지원한다. 그러나 1년 동안의 정부 지원이 끝난 뒤 6개월이 지나서 고용이 유지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2009년의 경우 전체 참여자의 33%, 2010·2011년에는 37%만이 회사에 남는 것으로 나타났다. 3분의 2가 회사를 떠난 셈이다.

급여가 낮다 못해 아예 0원에 수렴하는 '무급 인턴'까지 나오는 현실에는 정부도 한몫 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무급 인턴을 채용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이 제기돼 왔음에도 재외공관 등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을 중심으로 무급 인턴 모집공고는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주미대사관과 영사관 등 인기가 높은 재외공관이나 국제 비정부기구 인턴의 경우 인턴 선발 정보가 올라올 때마다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인턴 근무를 희망하는 회원들의 댓글로 뒤덮인다.



재외공관 체재비 월 200~300달러로 끝



"애초에 해외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재외공관 인턴 경험자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도 없어요. 활동비를 많아야 300달러 주는데, 그 돈으로 현지에서 체류할 수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어요." 외무공무원 시험 준비생 서은비씨(25)는 인턴 경력이 아무리 도움이 된다 한들 애초에 꿈도 못 꾸는 경력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인턴 모집공고 내용을 보면 일본·러시아의 경우 월 300달러, 독일은 월 200달러 안팎으로 체재지원비가 책정돼 있어 사실상 일반인이 지원하기엔 불가능한 실정이다. '공노비'마저 되기가 쉽지 않다는 푸념도 나온다. 게다가 일부 명문대의 학과장 추천서가 없이는 사실상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점 역시 인턴 희망자들의 박탈감을 키운다. 서씨는 "경제력과 학력을 대물림시키는 교묘한 관행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말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무급 인턴을 쓸 수 있는 배경에는 근로기준법이 있다. 근로기준법 2조 1항 1호에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에 '임금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는 교육생·실습생에겐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한때 법대생이었던 김영훈씨는 무급 인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 논리를 반박했다.

"근기법 2조 1항 5호에는 임금이란 사용자가 근로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어떠한 명칭으로든지 지급하는 일체의 금품을 말한다고 돼 있죠. 어떻게든 돈을 주면 임금인 건데, 대한민국 정부는 임금 받고 일하는 사람이 근로자가 아니라 종살이하는 걸로 아는가 봐요."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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